햇살이 따사로운 여름날, 나는 지방에서 KTX를 타고 올라온 아버지와 함께 중고차 매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차를 구매하시려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버지의 낡은 휴대폰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나이가 많으신 탓에 볼륨이 높았던 휴대폰 너머로,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객님, 저 다른 사람에게 차 팔테니 안 오셔도 돼요."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핸들을 꽉 쥐며,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 차를 팔기로 해놓고 왜 갑자기 차를 안 팔겠다는 겁니까?"
아버지의 목소리는 격앙되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의 인물은 오직 매장에 오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지금 거기로 가고 있으니까 만나서 얘기합시다!"
아버지는 전화를 끊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 씩씩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있었고, 손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달래며 중고차 매장 앞에 차를 세웠다. 우리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넓은 어깨와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장님이 짧은 인사와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눈빛은 냉철했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감돌았다. 심지어 손님이 왔는데도 물 한잔 주지 않았다.
"고객님, 저는 충분히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오전 약속을 오후로 미루셨고 오후 약속 시간에도 늦으셔서 다른 분에게 양도하기로 했어요."
사장님의 말투는 무겁고 단호했다. 아버지는 역정을 내며 반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분명히 오늘 차를 사러 오겠다고 어제 얘기를 나눴지 않습니까! 지방에서 KTX를 타고 오는데 새벽 기차를 못 타서 그다음 KTX를 타고 왔고 그에 대한 설명도 미리 드렸고요. 그리고 오후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은 제가 이쪽 지리를 잘 몰라서 늦었고요."
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사무실 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중고차 매장 사장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오전에 오신다고 해서 출근을 했고 오후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고 문자만 보내시는 거 보고 저는 차를 살 의향이 없다고 판단을 하였어요. 그래서 다른 분이 더 높은 가격에 사겠다는 데 제가 팔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저희가 아직 계약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흥분했는지 더 목소리를 높이며 반문했다.
"아니, 구두계약은 계약이 아닙니까? 제가 살 의향이 있으니까 주말 아침부터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온 거 아닙니까?"
중고차 매장 사장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충분히 기다렸고 더 이상 차를 팔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여기서 이러시는 건 영업방해밖에 안 돼요. 저에겐 신뢰가 중요한데 사장님은 약속시간에 늦어서 더 이상 팔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는 어이가 없었다. 주말에도 원래 매장을 운영을 한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올라왔는데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그것도 전화를 했는데 문자로 회신했다고 차를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차는 아직 매장 내에 있었다.
상황은 이랬다. 아버지가 매장에 오는 사이에 누군가 전화를 했고 해당 차량에 대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자 바로 중고차 매장 사장님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고 아버지가 식사 중이라고 곧 전화하겠다는 문자를 보내자 이를 빌미로 삼아 다른 고객에게 차를 판매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고객과의 신뢰를 지켜야 한다며 약속 시간에 늦은 아버지 잘못이라고 우겨댔다. 마치 신뢰에 죽고 사는 사람인 것처럼 당당하게 화를 내며 차를 팔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 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저렇게 흥분해서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분명 실수를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난 그 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중고차 매장 사장님이 담배를 피우겠다고 자리를 비우자 아버지에게 살며시 물었다.
"팔지 않겠다는데 꼭 이렇게까지 사야 되는 거야?"
아버지는 지방에서 기차 타고 올라온 이상 무조건 계약을 하고 내려가겠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고차 매장에 사장님 혼자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무실 안쪽에 장정이 3명이나 더 있었다. 심지어 사장님도 덩치가 워낙 컸다. 혹시라도 고성이 오가다가 아버지가 폭행이라도 당할까 봐 두려워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둘이서 싸우면 내가 말리면 되지만 나머지 세 명이 합류하면 그땐 어떡하지? 다양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각각의 셈법을 구해봤지만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몸싸움이 일어나게 되면 아버지와 난 두 발로 이 매장에서 걸어 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사장님이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해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냉랭했다. 나는 이제 막다른 골목이라는 생각하고 일어서려는데 아버지가 거기서 더 도발을 했다.
"저는 오늘 여기 차를 사러 왔고 계약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갑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나왔다. 이제 사장님이 연장을 꺼내 우리를 거칠게 내쫓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장님이 모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는 점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자동차보험 보상 담당자로 일했고, 이후 30년 넘게 카센터를 운영하며 차량 수리를 해온 자동차 전문가였다. 심지어 영어도 서툴렀지만, 미국 현지 딜러에서 기름때 묻혀가며 수입차 정비를 배우기도 했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분이었다.
아버지의 완강한 태도와 고집에 이제 많이 지쳤는지 사장님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다른 손님이 부른 가격에 가져가시겠다고 하면 제가 계약할게요."
내가 기다려 온 그의 논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무조건 치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처한 위험한 상황을 잠시 잊었다. 그리고 말은 생각보다 빨랐다.
"사장님, 지금 하신 말씀에 모순이 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뢰를 강조하셨는데, 이제는 돈 얘기를 하시네요. 사장님이 말하는 신뢰가 돈은 아닐 텐데, 저로서는 납득이 안 가요."
"저희 아버지가 약속을 어기고 늦은 것은 잘못한 거 맞아요. 하지만 칠순을 앞두고 지방에서 차를 사겠다고 기차까지 타고 오신 분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너무한 것 같아요."
한 시간 넘게 아무 말도 안 하다가 갑자기 입이 트인 나를 보더니 중고차 매장 사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어 아버지를 얌전하게 집에 모시고 갈 줄 알았는데 그의 궤변을 비틀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사장님은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승리감이 스쳐 지나갔다. 긴 침묵 끝에, 사장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원래 가격에 차를 계약하시죠."
아버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차 키를 받아 들었다. 사장님은 이럴 거였으면 애초에 언성 높이지 않고 차를 팔았을 것을 괜한 감정싸움을 했다며 사과했다. 아버지도 약속 시간에 늦고 언성을 높인 것은 잘못한 것이라며 사과했다. 그렇게 둘 사이 긴장은 해소되었다. 이후 주차장에서 아버지가 새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게 돼? 이게 된다고?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없구나.'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갈 무렵, 아버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승리의 기쁨이 가득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교환했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 교차한 깊은 동지애와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이렇게 아버지의 중고차 구매 대작전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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